(독자투고)최숙빈의 출생지 소두촌과 용흥사
(독자투고)최숙빈의 출생지 소두촌과 용흥사
  • 담양군민신문
  • 승인 2025.03.0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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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전 대전면 소두촌 전 노인회장 

최숙빈 영조대왕 어머니 생애!


파란 많은 인생의 역경을 다시 기록하고자 한다.


최숙빈은 당대 인현왕후나 장희빈보다 역사 전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땅 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했던 신용이상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때 미실이란 여성보다 결코 뒤지지 않은 인물이다. 최숙빈은 갑술옥사 및 무고옥등에 결정적 기여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간데 조선당쟁 속에서 꼭 살펴봐야 하는 인물이다.


최숙빈은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천민출신인 어린나이 일곱 살에 궁에 들어가 바느질하다가 장희빈 등장 후 혼란기에 특유의 의리, 대담성에 건강한 외모 등을 바탕으로 후궁에 올랐다.


후궁이 된 사실은 본인만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든가 숙종의 총애 때문이란 인식이 형성 될 수 있다.


최숙빈의 출생년도는 현종 경술년(1670) 11월이며 장래 남편이 된 숙종 나이는 10살이다


최숙빈은 창평현 갑향면에 해당되는 지금은 담양군 대전면 갑향리 소두촌에 태어났다.


최숙빈의 생가 터는 답 523-6번지로 지금은 경지정리로 그 위치만 남아 있다. 정한 수를 떠 놓고 기도하였다는 소두암만 외로이 서 있다.


또한 우물물을 길러 식생활을 한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궁녀는 보통 4~10세 소녀들을 선발한다.


김용숙의 논문에 의하면 조선 마지막 상궁 조 상궁(논문 작성당시 83세)의 증인에 의하면 가장 많은 나이는 7,8세 김용숙의 발생된(조선조 풍속연구) 상궁 중에 최고 우두머리는 제조상궁이다. 15세 정도가 지나면 궁녀 꽃이라 할 수 있는 상궁에 임명된다.


이문정은 숙종, 경종, 영조시대의 살아 있는 인물로 동지중추부사(종2품)의 정도부예우를 받았다. 또한 본명은 이 진정이다.


(수문록은 이조시대 당쟁사를 연구한 자료집) 아울러 최숙빈을 만난 것은 숙종 18년(1692)장희빈이 책봉된지 3년째 된 후 그의 나이 24세였다.


숙종이 최씨에게 장남을 낳은 시점은 숙종 19년(1693)10월 6일이다. 대략 숙종 20년(1694) 8월1일 둘째 아들이 탄생, 숙빈 방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숙빈 첫아이는 출산 후 2개월 만에 사망하고, 둘째 아들인 영조(이금)는 창덕궁 본경당에서 출생, 숙종 20년 갑술 9.13 무인일 또한 1700년 2월 12일에 이금이 연잉군에 책봉된다. 최씨는 입궁 17년 만에 숙종과의 만남에서 왕자를 출산하여 정1품의 빈의 자리에 올랐다.(수문록 저자 이문정의 숙빈실록에 적혀 있다)


민목사를 만나 한양으로 상경과 궁녀의 이야기는 생략하고 구사일생으로 생존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기록하고자 한다.


선대왕(숙종)이 벼개에 기대어 조는 사이 홀연히 꿈에서 신룡이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하다가 머리 뿔을 드러내고는 울며 선대왕에게 말하기를 “전하 속히 저를 구하여 주십시오.” 여기서 신룡은 태아를 말하고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함은 여인의 뱃속의 아이를 말한다.


혹 숙종은 장희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생각하였지만 희빈 처소는 별 다른 것이 없다. 그런데 담장 밑에 큰 독 하나가 엎어진 상태였다.


“저 독은 어째서 거꾸로 세워두었느나?”숙종은 이상히 여겨 환관에게 “독을 똑바로 세워라”하니 결박당한 여인이 바로 숙빈이었다. 이때 죽을 뻔한 아이는 영조가 아니라 최씨의 장남이다. 생후 2개월 만에 죽었다. 인현왕후 또한 숙종 27년(1701) 8.14일 35세로 사망하였다. 


숙종 27년(1701.9.23.) 숙종실록에 의하면 죽음을 목전에 둔 인현왕후는 오빠 민진후 형제 앞에서 취선당 이야기를 하며 누가 주상께 이것을 알릴 것입니까?


최숙빈이 숙종대왕에게 말 하였다.


그 후 숙종27년(1701) 9.23일 장희빈 오빠 장희제는 처형되고 희빈은 자진 사사한다. 쓸쓸히 지냈던 숙빈은 이현궁에서 숙종 37년(1711) 6.22일 창의궁으로 옮겨 최씨는 약 10면 만에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나이 42세, 10세도 안되는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던 연인ㅇ군 11세 때 숙종 30년(1704)서종재의 딸(훗날 정성왕후) 창의궁에 합류 한 후 연잉군 내외의 효도를 받으며 살았다. 숙빈은 숙종 44년(1718) 3.19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빈의 묘는 (숙종실록)경기도 양주군 온장리 지금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숙빈의 묘가 있다.


영조는 20년 만인 (1744)에 가서야 어머니 무덤에 묘호를 부여 하는데 성공한다. 어머니를 잃은 지 26년 뒤의 일이였다.


영조대왕이 오열하면서 “아 이십 오년동안 애쓰신 은혜에 만 분지 일이라도 보답 할 수 있을 듯 하다. 붓을 잡고 쓰려하니 눈물 콧물이 얼굴을 가린다. 지난날을 추억하니 감회가 갑절이 되는 구나.” 묘갈에 글을 쓰면서 20년의 긴 세월의 공로에 소령이란 묘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최숙빈 묘비사진첨부됨
묘비에는“유명조선국후궁숙빈수양최씨지묘”(有明朝鮮國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용흥사 동종
숙종대왕의 태몽에 의하여 절 이름을 용흥사라 명칭하였으며 7세기 범종 제작의 대가인 김용안이란 장인이 만든 것이 이 용흥사 동종이다. 이 범종 용누는 네 마리의 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담양의 용흥사 동종은 순치 원년 명동종이란 법종인데 이것은 청나라 순치원(1644)에 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최숙빈의 파란 많은 인생의 역경을 기록하게 됨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연구소 방문학자 김종성씨의 숙빈저서와 150년 본 마을 훈학선생 박태영씨 유래를 참조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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